고려 팔만대장경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끝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면서 서경에서 잔치를 열어 고위 무신들을 불렀다. 잔치가 무르익어 무신들이 술에 취하게 되자 이들을 주살했다.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문치가 확고해졌다. 요사에 따르면 거란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3차 침공에 대한 주장이 거란 조정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송도에 왔던 진호가 갑자기 병으로 죽으면서 깨지게 된다. 견훤은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하고[14]인질로 잡고 있던 왕신을 죽인 후, 공주성을 기습하여 웅주와 그 주변 일대를 모두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록에는 없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을 보면 왕건은 927년 3월 운주를 쳐서 함락시키고 이어서 웅주까지 공격했으나 실패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934년 '운주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후 웅진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게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때 견훤의 출정은 운주와 웅주 지역을 빼앗았음을 알 수 있다.


왕건은 906년 궁예의 명을 받고 정기장군(精騎將軍) 금식(黔式) 등을 거느리고 상주의 사화진에서 견훤과 여러 번 싸운 끝에, 결국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를 공격하고 나주시 금성을 정복하였다. 이후 덕진포에서 소수의 전함들로 견훤의 대함대를 화공으로 대파시켜 나주 사람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이후 서남해안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해적 활동을 하던 '수달'을 체포해 궁예에게 보내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변방에서의 거듭된 공로를 인정받아 문무백관의 최고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의 지위에까지 올라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었다.


여러분도 시간이 되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서 청자를 한번 감상해보세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안 앞바다에서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 동안 총 11차례에 걸쳐 해저 유물 발굴이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이때 발굴된 유물의 90%는 도자기인데 대부분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고려청자도 있었지만, 그 숫자는 7개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이런 형식의 노래로는 "동동" 외에 "관등가(觀燈歌)"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가 있고, 민요에 "청상요(靑孀謠)"가 있다.


한편,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된 뒤 사실상 왕실을 보존하는 데 급급하였다. 궁예가 905년(효공왕 9) 8월에 죽령(竹嶺) 동북쪽을 침략하였을 때, 신라 효공왕은 이미 이를 힘으로 막을 수 없어서 성주들에게 나가서 싸우지 말고 굳게 지키라고만 하였다. 920년(경명왕 4)에는 견훤이 대야성과 구사성을 함락시키고 진례성까지 쳐들어오자, 경명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궁예는 904년에 이미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고치면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축소하였다. 또한 911년에 후삼국의 영역을 태반이나 차지하자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으로 바꾸면서 신정적(神政的) 전제정치(專制政治)를 추구하였다. 그가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하면서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내세워 정치적인 반대 세력들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딸, 누이 등이 없던 호족들의 존재와 딸, 누이들과의 결혼으로 안심할 수 없었던 태조는 호족들의 아들, 동생, 조카들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송도로 올려보내게 하여 일종의 정치적 인질, 볼모로 잡아두고 있었다. 이는 자신과 결혼한 호족들에게도 집안의 남성을 송도로 올려보내게 함으로써 다른 호족들의 반발을 막기도 했다. 왕건이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과 신라에 적개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했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는 신라의 장군 출신인 까닭으로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견훤보다는 호족 출신인 왕건을 더 믿을만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내비쳤다. 왕건의 이 말에 궁예는 껄껄 웃으면서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고려 왕조는 실제로 ‘통일’을 강조하면서 꾸준히 삼국에 대한 계승 의식을 희석시키면서 우리 민족을 재통합하였다. 그 결과 예맥(濊貊族) 계통과 한(韓) 계통으로 구성된 우리 민족은 조선 왕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궁예가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하였다가 다시 태봉으로 나라 이름을 고치면서 신정적 전제왕권을 추구하자, 왕건은 궁예와 거리를 두고 주로 나주 지역을 경략하면서 활동하였다. 여기에다 934년(경순왕 8) 정월에 운주(運州)에서 고려에 다시 대패하였다. 그 뒤 후백제는 견훤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내분까지 발생하였다. 그 결과 신검(神劒)이 935년(경순왕 9) 3월에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


이와 함께 고려시대의 기술과 과학은 문화와 예술 발전을 이끌어냈습니다. 석굴암 사찰을 비롯한 다양한 불교 사찰에서는 석탑과 불화 등의 예술 작품이 그 시대의 미술적 역량을 보여주며, 이러한 작품들은 고려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려시대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여 문맹 해소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어 교육 분야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고려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왕조 중 하나였습니다. 이 시기의 정치 체제는 중앙집권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이 국가의 중심에 서면서 전통적인 사대주의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양반 제도의 도입으로 더욱 강화되어 양반과 노비 계급 사이의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목종 때 경주  사람 융대는 양민 500여명을 사노비로 만들어 궁인 김씨와 고위 관료 김락 등에게 뇌물로 주었으며 종친, 대갓집 중에는 100여 구이상의 노비를 소유한 사례도 있었다. 실제로 노비는 주인집과 떨어져서 그의  땅을 경작한는 외거  노비가 대부분이었으나, 함께  거처하면서 잡일에 종사하는 노비들도 다수 존재하였다. 또 하나의 공식적 수입원인 녹봉도 문종 때에 완비되었는데 400석을 받는 1과부터 10석을 받는 47과까지 세분하였다. 녹봉은 주로 쌀, 보리  등의 곡물로 지급하였으나, 베나  비단 등을 주기도 하였다. 관료들이 받는 녹봉과 전시과에서 얻어지는 수입은 대략 비슷한 양이었다고 추정되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시과는 원칙적으로 평생을 보장하는 데 반하여 녹봉은 현직자에게만 보장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추진되던 흥왕사 창건 사업으로 개경  인근 덕수현의 백성들이 노역에 시달려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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